능선

착한초보 2009. 6. 8. 18:33

 

아침에 일어나 주먹밥을 만들어놨더니 식구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다 먹어버렸다

그래서 얼린 물 한병 달랑 들고 집을 나섰다

산길에 접어들자 물병이 조금 거추장스럽다

 

자기가 이거 쫌 들고가면 어떨까

구찮다, 니가 들어라

자기는 물병 하나 들고가서 마누라가 산에서 목마를 때 바치리라는 마음도 없냐

마누라가 산에서 목마르면 약초를 캐서 돌로 찧어서 녹즙을 만들어 바치께

. . . . . . .

 

초봄에 갔을 때 사람들이 주말농장에 흙 갈아엎고 있더니

지금은 푸성귀들이 밭에 그득하다

연두색 콩깍지엔 어린 콩들이 살짝 비친다

내려갈 때 서리해 갈까

 

그땐 꽃피면 산길이 얼마나 예쁠까 상상만 했었는데

꽃은 다 지고 녹음만 푸르다

쉼터 벤치에 잠깐 앉았다

 

남편은 아랫사람들 잡은 무용담을 들려준다

자기가 우리 아이들 교육을 맡았으면 애들이 참 크게 될낀데, 아쉽다

아이다, 내가 맡았으면 내 성질에 딸래미들 패서 반쯤 죽여놨을 끼다, 애정이 많아서...

 

이번엔 꼭 헬기장까지 오르자고 다짐하며

무거운 물병을 서로 들라고 티격태격하며

무거운 몸들을 이끌고 산길을 오른다

 

시계를 보니 벌써 두 시간째 걷고 있는데

헬기장이 안 나타난다

배가 고픈데

 

어떤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토마토를 하나씩 들고 통째로 베어먹고 있다

맛있겠다

우리는 물병을 굴려 남은 얼음을 녹여 나누어 마시고

담엔 먹을 거 싸가지고 꼭 정상까지 올라가기로 하고 하산한다

얼른 내려가서 감나무집 칼국수 먹을 생각에 걸음이 빨라진다

 

올라갈 땐 안보이던 샛길이 여기저기 나타나 길이 헷갈린다

담엔 하얀 빵을 길에 떨어뜨리면서 올라가자

 

어떤 사람이 국악을 큰 소리로 틀고 간다

산새소리가 잠깐 묻혀버린다

산에서 담배피는 사람은 정신나간 놈입니다

산에서 음악트는 사람은 나쁜 놈입니다

이런 표어를 써붙여야 된다고 남편이 투덜댄다

 

올라갈 땐 나보다 빠르더니

내려갈 때 더 힘들어하는 남편

무거운 몸을 받쳐야 하니 다리에 더 무리가 간단다

산악자전거를 탄 젊은이들이 쌩 지나간다

 

내가 저 나이땐 저거 안타고도 날아다녔는데...하는

남편 머리엔 살짝 서리가 앉았다

뱃살 능선이 조금은 내려갔나 살짝 쓰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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