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너는 주추놓고 나는 세우고

착한초보 2010. 4. 6. 01:43


책은 때로 감성을 자극하기도 하고 지성을 만족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책은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끌어 읽는 사람의 깊은 내면을 움직이기도 한다.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이 편지 모음집을 읽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분을 만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몇 해 전 배론 성지의 성당에서 순교성인의 다리뼈가 안치된 것을 보았었다.

이 책을 덮으며

그분 앞에, 그분의 다리뼈 앞에 깊은 절을 드리고 엎드려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만나게 하시고

저의 마음을 움직여주신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라틴어 편지 원문을 번역하신 정진석 추기경님이 책머리에 쓰신

한국교회의 역사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생애에 대한 소개 글은

읽는 사람의 주의를 그 시대로 이끌고 마음을 준비시켜주었다.


수록된 열아홉 통의 편지 중 대부분은 신학교 시절의 은사이신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보내신 것이며 일부는 리부아 신부님께 쓰신 것이다.

이 모든 편지들을 유창한 라틴어로 쓰셨다는 사실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지성의 깊이에 존경심을 가지게 하며,

읽어가는 동안 느끼게 되는 그분의 지극한 신앙과 사랑은 그분의 자손임에 깊은 감사와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또한 편지에서 드러나는 당시 신자들의 열절한 믿음은 오늘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동료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시자 최양업신부님은 얼마나 비통하셨을 것인가

동시에 신부님은 하루빨리 조국으로 가 신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셨으리라

여러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마침내 도착한 조국에서 신부님을 맞이한 것은 감시자와 반대자들이었다.

그러나 갖은 위험과 고통 중에서도 주님의 보살핌으로 신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신부님과의 만남에 신자들은 얼마나 감사했을 것인가

신자들과의 만남은 얼마나 신부님을 기쁘게 했을 것인가...


그러나 기쁨보다는 안타까움이, 위로보다는 위험이 더 많은 나날이었다.

공소 사목을 위해 몇날 며칠을 걷는 것은 일상사였고 간발의 차로 위험을 피한 순간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중에도 신부님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당신의 고난이 아니라 박해받는 신자들의 고통이었다.

특히 여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유라고는 조금도 누리지 못했던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했을 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한 것은 조정의 정책으로 인한 외부적인 것과 가문의 안녕만을 도모하고자 하는 내부적인 것이 있었다.

모두가 천주교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초래한 일이었다. 신부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거듭 지적하셨듯이

프랑스 정부의 공적인 입장표명과 도움이 있었더라면 박해상황이 덜어질 수 있었을까...


당시 신자들은 그토록 많은 불편과 위험을 기꺼이 감내해야 했으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아무것도 가로막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많은 장애는 오히려 주님께 대한 사랑을 더욱 크게 하였던가 보았다.

어떤 사랑이 이보다 더 뜨겁게 불타오를 수 있을까...

예수님이라는 같은 대상을 향한 최양업신부님과 조선 신자들의 사랑은

그 시대의 모든 어둠을 밝히고도 남을 만큼 강한 것이었다.

그런 신자들과 살았던 최양업신부님은 어쩌면 더 행복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신부님의 편지에 기록된 그들의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크신 능력을 합당한 인간에게서 어떻게 드러내시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빛은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빛에서 희망을 찾아 모여들었던 것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셨다.

당신의 몸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혹사하신 결과 신부님은 마침내 탈진하여 쓰러지셨다.

그리하여 피의 순교자로 세상을 떠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뒤를 이어

땀의 순교자로 하늘에 오르셨다.

신부님은 천국에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빌고 계신다.


온갖 배부른 투정과 높아진 눈과 밝아진 귀로

고급한 믿음을 찾아 헤매는 나를 향해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말씀하신다.

오직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최양업신부님이 들려주시는 신앙선조들의 이야기는

내가 오늘 누리는 신앙의 자유가 내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그분들께 나는 사랑과 감사와 그리움을 고백한다.


이 땅의 들꽃들은

이름없이 스러진 당신의 얼굴입니다

바람마저 당신의 비명소리를 실어옵니다

그 한 목숨으로 오늘 제 목숨과 숱한 목숨을 살리셨습니다

당신이라 어찌 병든 부모와 우는 젖먹이가 없었겠습니까

당신이라 어찌 쓸고닦던 초가와 갈아야할 밭이 없었겠습니까

몇 분의 시간도 아까워하며 내어주는 저입니다

손끝 한번 내미는 일도 사랑이라 우기는 저입니다

얼마나 큰 사랑이기에 당신을 그 길로 데려 갔습니까

그 길로 가신 당신은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당신의 유산을 분에 넘치게 받은 제가

이 사랑을 잊지 않도록 간구하여 주소서

말로만, 마음으로만

즐겨 사랑을 고백하는 제가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행함으로써

당신을 조금이라도 닮아갈 수 있도록

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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