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순교 성인 황 석 두 루카 1.

착한초보 2010. 4. 29. 23:37

스크랩] [[자 료]] 94. 성인 황석두 루가 회장 (1866.3.30 군문효수형)|[성인 황석두 루까]

조회 63 | 06.04.05 04:00 http://cafe.daum.net/Coreansanctus/14ZP/15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3월 23일 사형
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갈매못’에서 안 주교,민 신부,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약    전>
 
황 석 두(루가 1813-1866)
 
일명 재건으로 불리는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부유한 외교인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그를 정성껏 공부시켰을 뿐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 하기
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20세가 되던 해 석두는 종을 하나 거느리고 말에 올라
과거시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저녁 한 주막에 들어가 묵고 있었는데, 그 때 어떤 천주교 신자를 만나 그로
부터 천주교 도리를 오랫동안 듣게 되었다. 젊은 석두는 그토록 유식한 교우의 말에
크게 감영을 받고 그의 주선으로 천주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만에 아버지에게로 되돌아왔다.
 
아버지는 놀라 이상히 생각하자, 과거시험을 일찍 치르고 왔다고 말하는 도리밖에 없
었다. 그러나 늙으신 아버지는 거짓말임을 알아차리고 계속 캐물은 끝에 자기 아들이
되돌아온 근본동기를 알게 되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렸으나 석두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자기 방으로 들
어가 천주교 교리책을 배우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자기 부인을 영세 입
교시키고 집안 몇 사람까지 개종시키었다.
 
한편 늙으신 아버지는 이 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잘 알고, 또 천주교가 가문을 파괴하는 종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격분한
나머지 석두를 불러, "어느 양반집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단 말이냐? 이제
부터 다시는 천주교 교리공부는 못한다"하고 말하였다.그러자 석두는 "죽어야 한다면
죽을지언정 교리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하고 고집하였다.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볏짚을 썰 때 쓰는 작두를 가져오게 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죽인다고 엄포해도 교리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목을 이 작두에 넣어라."
"왜 제게 그런 명령을 하십니까?"
"몹쓸 녀석! 목숨을 걸고라도 천주를 섬기겠다고 말하니 너를 죽이려고 그런다."
"제가 천주를 숭배하기 때문에 저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그러면 목을 작두날 밑에 들이밀겠습니다."

하인들은 감히 작두의 발판을 밟아 누르지 못했고 아버지는 소리쳐 울면서 다른 데로
가 버렸다.석두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었다. 3년동안을 그는
말한마디 하지 않고 진짜 벙어리처럼 지냈다.

이로 인해 온 집안식구들은 걱정이 되어 그의 벙어리병을 고치려고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해 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석두는 부모가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서 "아버지"하고 불렀다.아버지는 "네가 말을 하다니
"하고 깜짝 놀랐다.

"저는 벙어리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엄금하셨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 교리가 어떤 것이냐? 내가 좀 읽어 보게 그 책들을
가져오너라."그의 아버지는 책을 읽어 보고 나서 슬픔과 경탄으로 가득 차서 그 고장에
교리 선생이 있는지를 알아보게 하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교리 선생 한 분을 모셔오너라. 이왕 우리가 이 교리를 배울 바에
야 몰래 믿지 말고 드러내 놓고 믿자꾸나."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입교했고 가족도 모두 입교하였다. 그것은 1839년 박해가 있은
뒤의 일이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외교인들까지도 석두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 않은 그의 예의 범절에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다가 페레올 주교가 한국에 입국하게 되니 황석두 루가는 이 성교회를 위해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천주님께 서약하였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하는 조건 아래 황석두를 사제품에 올릴 계획을 세웠
나 교황청에서는 당시 한국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어 그의 부인이 지낼 곳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사망하고부터는 그의 친척들이 집안일을 맡아 보면서 아버지의
가산을 횡령하였으므로 황석두도 자기 유산마저 친척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리
하여 가족들은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황석두는 좀더 효과적으로 가족을 도우려고
신자들의 신용말고는 다른 자본도 없이 여러 가지 불행한 투기를 하였으나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파산시키는 일밖에 성공한 일이 없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맺고 있는 황석두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그에게 돈을 꾸어 주는
사람들이 황석두를 함정에 빠뜨리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출입을 금하였다. 이
일종의 추방이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1858년 페롱 신부는 황석두에게 그의 모든 사업을 포기하도록 결심시키고 그를
한문선생으로 채용했다. 그 뒤 페롱 신부가 황석두 루가에게 전교회장의 일을 맡기게
되자 그는 이 회장직분을 가장 훌륭하게 열성적으로 이행해 나갔다.

"황석두는 내가 공소에 가서 성무를 수행하는 데에도 따라다녔는데 나는 그가 교구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고 이 선교사는 증언했다.
황석두는 조안노 신부 밑에서 회장이 되었다가 다시 베르뇌 주교밑에서 회장이 되어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 발간에 기초원고를 썼다. 그리고 다시 다블뤼 주교를 도아서
번역출판과 그 교정에힘을 기울였다. 그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여 선교사나 신자들
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빚을 갚는 데 썼다.
 
이리하여 모든 이들은 다시 그를 신용하게 되었고 그의 채권자들 조차도 그에게 많은
존경과 애착을 보여 주었다.
 
그러던 중 3월 11일 다불뤼 주교가 체포되었을 때 석두는 자기의 영적 스승이요,
아버지인 주교를 따라 가기를 원해서 포졸들에게 자기가 주교의 제자라고 말했다.
그 때 다블뤼 주교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말하자,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
에서는 같이 살았는데,"하고 대꾸했다.

포졸들이 '오지 말라'고 하면서 그가 주교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포졸들은 그 역시 죄인으로 잡아서 서울로 데리고 갔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는 관리들에게 한결같이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한때 "상부의 명령을 완화해서 이 사람을 살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열의가 너무 대단해서 오히려 관리들은 더 가혹하게
곤장으로 치게 하였다. 옥살이 4일째인 1866년 3월23일 드디어 군문효수라는 사형언
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고 있었고 또 그의 혼인날도 한달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사람의 피를 서울땅에서 흘리게 되면 국혼에 해롭다 하여 400리나
떨어져 있는 충청도 보령고을 수영에 있는 반도로 데리고 가서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들은 즉시 임금의 윤허와 함께 보령의 갈매못에 압송되어 1866년 3월 30일 금요일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감옥에서 마지막 식사를 손에 받아든 황석두 루가는
"우리는 지금 천주님이 창조하신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습니다."하면서 기꺼이 먹었다.
 
그리고 기도에 몰두하였다.
다블뤼 주교가 처형될 때 망난이가 첫번째 칼을 내리치고 나서 돈을 더 내라고 하며
오래 흥정을 하는 동안 황석두 루가는 위앵 신부가 겁을 질려 울며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즉시 신부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에 위앵 신부는 다시 힘을 얻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른 두 신부들의 순교에 이어 황석두 루가의 차례가 되자 용감하고 침착하고 즐거음이
넘쳐 흐르는 표정으로 참수에 임하였으니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의 시체는 3일이 지나서야 안주교와 함께 같은 곳에 매장되었다가 얼마 뒤 그의
아들이 와서 모셔다가 장례를 지냈는데 오뉴월이었으나 시체는 하나도 썩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순교자 성인 황 석 두 루 카 2.|한국 순교자
thomas | 조회 0 | 09.10.25 16:10 http://cafe.daum.net/hsdorf/JPT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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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
    
홈페이지 연락처 (043) 833-5064
주소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87-2 교구 청주교구

■ 지리좌표  황석두 루가 묘지 앞 북위 36°45′49″ 동경 127°59′41″
■ 문 의 처  사무실 (043) 833-5064
■ 찾아가는 길
   충주에서 3번국도를 따라 남행하면 수안보 온천에 이른다. 수안보에서 계속 3번국도를 따라
12Km쯤 가면 삼거리에 닿는다. 이 지점에 검문소가 있고 34번 국도 쪽으로 800m쯤 가면 연풍성지
안내 푯말을 볼 수있다.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국 남동쪽 끝에 연풍면이 나선다. 해발 1,017미터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가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연풍은 전체가 소백 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군과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 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 됐었다.


남부 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 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 1·2·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신부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운다.


은신처로서 새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읍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했다는 최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옯겨져 묻힌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가(1811-1866년)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3년 동안의 벙어리 흉내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킨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두고 성서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뜬 뒤 그는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못했다. 병인박해 때는 다블뤼 안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칼을 받아 순교한다.


 연풍에는 또 한가지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망 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매입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나 발견됐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 됐다. 1979년에는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성지로 이장했다. 연풍성지와 관련하여 선종하신 오기선(요셉) 신부님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매년 2만여 명씩 순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함께 순교 현양비가 건립돼 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제관을 비롯한 기념관 건립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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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 료]] 황석두 루카성인과 순교자 님을 위한 현양 미사(연풍 성지)|[성인 황석두 루까]
조회 10 | 07.10.03 22:21 http://cafe.daum.net/Coreansanctus/14Z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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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허심촌
글쓴이 : thomas 원글보기
메모 : 발췌문헌 : 김옥희, {103위 성인전}, 도서출판 순교의 맥, 2004, 331~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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